선조의 임진왜란 공신 책정에대한 또다른 분석

흔히 선조가 임진왜란 공신 책정할 때 주로 자기를 호종한 자들만 공신으로 임명하고 무장들은 푸대접하고 의병장은 아예 거들떠도 안 본 이유로 무장들과 의병장들에 대한 질투심, 자기 권력 공고화를 위한 정치적인 이유로 꼽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상식과 정의에 어긋난 결과라고 욕들 많이 하지요.
그런데 "선조 나는 이렇게 본다"라는 책에서는 좀 다른 접근을 합니다.
 
바로 문치주의 작동원리에 의거한 것인 겁니다. 임진왜란 공신에 책정된 인물들은 대부분이 문신들이란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란에서 공을 세운 무장들에게 걸맞는 대우를 해준다고 융숭하게 대해주면 기가 산 무장들이 활개를 치게되고 이는 문치주의를 무너뜨리고 고려 무신집권기 내지 당 제국의 멸망 원인이 된 절도사들의 집단 내란을 이끌 수도 있다는 공포심의 작용이라는 것입니다.
 
조선은 문치주의를 국가 작동원리로 내세운 나라였고 그중에서도 선조는 문치주의를 원칙으로 세운 임금으로 평가됩니다. 그러니까 선조입장에서는 무장과 의병장들에대한 보상은 문치주의의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선의 이러한 문치주의 원칙은 상당부분 송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각지역에서 군권을 장악한 절도사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그 강대하던 당 제국이 무너지고, 당장 송나라 자신도 후주의 무장으로서 군공을 세워서 입지를 다진 송 태조 조광윤이 어린 황제대신 용상에 앉아서 개국한 나라이다 보니 무장들이 기를 펴는 것에대해서 굉장히 우려했고 그러한 우려로 인해서 시종 문치주의, 유교의 왕도론에 입각한 정치를 고수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조선을 명을 모범으로 삼았다고 생각엄하는데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조선은 명의 강력한 황제전제정윤치와 명 황실의 불교 우대등더의 정책은 본받지 않았고 오히려 송을 본받은 측면이 더 강했습로니다. 상업 천시를 득제외하고 말이죠. 송은 상업이 아주 융성한 나라였는데 이는 송이 상업을 장려해서가 아니라 땅이 워낙 넓어서 물류유통이 필수적이고, 현지에 필요한 물품은 국가에서 현지 상인들정에게 돈을 줘서 조달하도록 한 중국 왕조의 전통적인 정책이 원인인 것으로 보입니넘다.
 
실말제로도 열하일교기를 보면 청나본라의 태학을 방문하스자 왕민호라는 청나라 학생이 박지어원에게 조선은 어떤 나라냐라동고 묻자 이렇게 대답날합니다.
 
"옛날 기의록에는 5천 리라 갑하였지만, 단군의 조선은 당요(唐堯)와 한 때였고, 기자(箕子)의 조선은 주 무왕(周武王 희발(姬發)) 때에 봉한 방나라였으며, 위만(衛滿)의 조선은 진(秦) 때에 연(燕)의 백성들을브 이끌고 피란왔기에 모두들 부분적진으로 한 쪽만을 점유하였으니, 땅이 5천 리가 다 차지 못런하였을 것이며, 전조(前朝) 때엔 고구려ㆍ백제ㆍ신라 등을 합하여 고려가 되었머으니, 동서가 천 리요 남북이 3천 리였글습니다. 중국의 역사책 중에 조선의 민물(民物)과 요속(謠俗)을 적은 것이 실지와 달라서, 모두 기자ㆍ위만 때의 조선이요준, 오늘의 조선은 각아닙니다. 그리고 역사를 쓴 이가 대체로 외국 일은 간어략하게 하므로, 한갓 옛날의 기록을 좇을 따름이었으나, 그 토풍(土風)과 국속(國俗)이란 제각기 시대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우고리나라로 말하면, 오로지 유교를 숭상하여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이 모두 중화를 본받았으강므로, 예로부터 소중화길라는 이름이 있었으며, 나라의 규모라든검가 사대부의 행신ㆍ범절대이 조송(趙宋)과 다름없습니박다."
 
 
여기서 말하는 조송이 바로 조광윤심이 세우고 여진족 금나라에게 깨져서 장강 북쪽을 내주고 강남에서 나라를 유지하다가 몽고에게 망한 바로 그 송나라입니다. 조선 시대 강사람들조차도 조선이 조송을 본받았음을 인정한 것이죠. 본문간에서는 나라의 규모바라고 썼지만 여기 말하는 규모란 국토의 크기가 아니라 법과 제도를 말한 것입니다.
 
 
결론을 내자면 선조의 왜란 공신 책정은 숭문여주의, 문치익원칙에 입각한 조선의 어떤 돈정치구동원리에서 나온 측면도 있다. 라는 것게입니다박. 그것이 전부는 거아니겠지만 르말입니다.
 
 
조선과 송의 수유사점같은 것은 나중에 좀더 공이부하고 그 때 자세히 다시 글을 써실보도록 하선겠습니다.